창덕궁 단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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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소개 [편집]
2. 이름 [편집]
3. 역사 [편집]
4. 용도 [편집]
4.1. 조선시대 [편집]
단봉문은 정문인 돈화문을 사사롭게 드나들 수 없는 왕족 및 그 친인척, 그리고 궁인들이 주로 출입한 문이었다. 관원들 중에서는 내시부 소속의 중관들이 이용했다.
임금이 일반 선비처럼 변장하고 잠행에 나설 때에도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도 대부분 이 문을 통해 나갔다.[1] 또한, 정조 때 왕비 효의왕후가 아이를 못 낳자 후궁을 간택했는데 그 때 후궁 후보들이 이 문으로 입궐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궁녀으로 변장하고 창덕궁을 빠져나갈 때도 단봉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친국이 열릴 때 죄인이 이 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단봉문은 궁 안에서 여러 사적인 일이나 그닥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주로 활용하던 문이었다.
그런 만큼 문단속 또한 굉장히 엄격했다. 1476년(성종 7년)에 병조 사령 정연부가 문이 잠긴 후에 제멋대로 단봉문을 열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했고#, 정조 시절 숙위대장 홍국영이 한 밤 중에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최측근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조차 단봉문 출입으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단봉문을 쉽게 이용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임금이 일반 선비처럼 변장하고 잠행에 나설 때에도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도 대부분 이 문을 통해 나갔다.[1] 또한, 정조 때 왕비 효의왕후가 아이를 못 낳자 후궁을 간택했는데 그 때 후궁 후보들이 이 문으로 입궐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궁녀으로 변장하고 창덕궁을 빠져나갈 때도 단봉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친국이 열릴 때 죄인이 이 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단봉문은 궁 안에서 여러 사적인 일이나 그닥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주로 활용하던 문이었다.
그런 만큼 문단속 또한 굉장히 엄격했다. 1476년(성종 7년)에 병조 사령 정연부가 문이 잠긴 후에 제멋대로 단봉문을 열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했고#, 정조 시절 숙위대장 홍국영이 한 밤 중에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최측근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조차 단봉문 출입으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단봉문을 쉽게 이용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4.2. 현대 [편집]
20세기 후반까지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던 순정효황후, 이방자, 덕혜옹주 등을 만나러 오는 종친들과 낙선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출입했기 때문이다.
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빈청과 혼청을 낙선재에 각각 2005년 7월과 2007년 7월에 설치했을 때, 단봉문에 현수막을 걸었다.
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빈청과 혼청을 낙선재에 각각 2005년 7월과 2007년 7월에 설치했을 때, 단봉문에 현수막을 걸었다.
이구의 장례 때 설치한 현수막# 양쪽 가장자리의 글자는 각각 '애'(哀)' '도(悼)'이고 가운데에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 빈청(大韓帝國 皇世孫 李玖 邸下)'이라 적혀있다. |
5. 구조 [편집]
6. 여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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